content="43d530a27c1851408e54ef343518959b7d5bdf3e" /> 중국의 3대 악녀 : 중국 역사의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이야기

중국문화이야기

중국의 3대 악녀 : 중국 역사의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이야기

육육팔팔 2021. 9. 17. 02:20
반응형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 624~705)

 

 

측천무후는 30살에 황후가 되고 죽을 때까지 50여 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여성으로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여걸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특하고 능력있는 자신의 친 아들 장남과 차남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한 잔혹한 엄마이자 폭군이었으며 음탕한 요부인 악녀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드라마틱한 인생의 여황제 측천무후는 어떻게 여성의 몸으로 황제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으며 왜 3대 악녀 중 한 명이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무측천은 사천성 광원(廣元) 출생 출생으로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황제가 된 후 스스로 글자를 만들어 무조(武曌)로 개명합니다. 측천무후라는 호칭은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는데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무측천(武則天)' 호칭을 폭넓게 사용합니다.

 

 

측천무후      

 

무조는 624년 당나라 개국공신 무사확과 수나라 황실 출신 둘째 부인 양 씨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고 아버지 무사확은 유명한 목재상으로 수양제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할 때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무조는 어릴 때부터 미모가 출중했고 총명하여 아버지 무사확은  딸에게 말타기, 활쏘기, 춤과 노래 등 공부를 시켜 다방면에 뛰어났으며 특히 시를 짓고 쓰는 능력도 훌륭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무사확이 죽은 후 집안의 재산은 첫째 부인의 자식들이 모두 가져가고 무조는 어머니·동생과 매우 빈곤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唐) 태종의 본처 장손황후가 서거한 2년 후인 637년에 태종이 무측천(14살)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후궁으로 불러들여 '무미랑:武媚娘(무씨 성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예명과 정 4품 재인(才人)으로 후궁 지위를 하사하였지만 총애를 받진 못해 아이가 없었습니다.

 

 

 

태종(남편)의 아들 이치(李治)와 사랑에 빠지다

 

 

648년 태종은 병세가 심해져 무조가 간호를 했는데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는 간호를 하는 무조와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되며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이듬해 태종이 죽고 이치는 황위에 올라 고종(高宗)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황제가 죽으면 아이가 없는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하는 황실 법도에 따라 무조 역시 머리를 깎고 천조라는 법명으로 감업사에 들어가 비구니로 살게 됩니다.

 

 

어느 날 고종 이치는 감업사에 들러 무조와 다시 만나게 되고 무조를 궁으로 데려와 후궁으로 삼았고, 황후 왕 씨 또한 남편 고종이 가장 총애하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하여 무조를 환영합니다. 

 

 

황후 왕씨와 무조는 결탁하여 소 숙비를 제거하고 고종의 총애를 받은 무조는 황자를 낳아 소의(정이품)로 책봉되었습니다.

 

 

소숙비는 죽기 전에 무조에게 "나는 죽으면 고양이가 되고 너는 죽으면 쥐가 될 것인데 난 영원히 너를 물어 죽일 것이다!"라는 저주의 말을 퍼붓습니다. 이 저주로 무조는 평생 궁에서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키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조가 딸 안정 공주를 낳자 황후 왕 씨가 무조의 처소에 안정 공주를 보러 왔는데,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 안정 공주를 이불로 덮어 죽이고 황후가 죽였다며 모함을 했고 고종은 황후를 내쫓아버렸습니다.

 

 

그 후 무조는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14살에 궁에 들어온 후 16년 만에 황후(31세)가 되었고 고종과의 사이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잔인한 엄마의 수렴청정

 

 

정치적으로 큰 힘을 쓰지 못하던 고종은 무황후에게 의존을 하고 병세가 심해지자 무 황후는 수렴 청청을 하게 됩니다. 무 황후는 자신의 황후 책봉을 반대한 고종(남편)의 외숙부이자 재상 장손무기 일가를 몰살하고 황태자 이충(李忠)을 폐위시키며 자신의 장남 이홍(李弘)을 태자로 책봉합니다.

 

 

고종은 날이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자 황제의 자리를 태자 이홍(李弘)에게 물려주려 하자 무황후는 안팎으로 지지를 받던 이홍을 견제해 태자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의 친 아들 이홍(李弘)을 독살했습니다.

 

 

이후 총명한 둘째 아들 이현(李賢)을 황태자에 책봉하지만 또 다시 위기감을 느껴 아들을 모함해 폐출시키고 이현은 유배지에서 '황대과사'라는 시를 썼고 모후에 의해 자결 당합니다.

 

 

그 후 유약하고 자신의 말을 잘 따르던 셋째 아들 이현(李顯)을 새로운 황태자로 삼았는데  3년 후인 683년 고종 이치(55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현(李顯)은 황제에 오르며 중종이 되지만 외척세력을 끌어들인다는 명분으로3개월 만에 또다시 폐위시킵니다.

 

 

결국 막내아들 이단(李旦)을 꼭두각시 새로운 황제(예종)로 책봉했고, 자신은 황태후가 되고,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직접 관장하며 모든 요직에 무씨 일족을 등용합니다.

 

 

자신의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없어지자 조정 대신들은 황태후 무조의 황제 즉위를 계속해서 예종에게 주청 했고 엄청난 압박을 느낀 예종은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어머니 무조에게 넘기게 됩니다.

 

 

이에 황태후 무조는 690년 황위를 넘겨받아 67세의 나이로 최초의 여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황제가 되자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시대를 그녀의 성을 붙여 '무주(武周)'라고 불렀습니다.

 

 

판빙빙이 연기한 '무미랑전기' 의 측천무후

 

공포정치와 남총

 

 

그녀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들을 동원해 당나라 황실 종친과 대신들을 대거 숙청해버렸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을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는 자는 무조건 죽였는데 공식적으로는 93명 비공식적으로는 200명 이상을 죽였다고 합니다.

 

즉위 후 무측천은 지금의 '신문고' 같은 제도를 운영하면서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나 부패한 신하들을 관리하였는데 워낙 잔혹한 형벌이 뒤따랐기 때문에 위법한 행위를 저지르거나 밀고에 걸려들면 누구든 화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측천무후는 남자 편력이 대단해 황제로 등극한 후 중국 전역에서 젊고 잘생긴 풍채 좋은 남자들을 모집해 궁궐로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남총'이라는 기관을 만들었고 중국 전역에서 무려 3,000명의 젊은 남성들을 남총으로 뽑아서 궁궐로 입궁시켰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특히 장종창과 장역지 형제를 아주 총애했다고 하며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젊은 남성들과 뜨거운 밤을 보냈으니 대단히 음탕한 요부라 할 수 있습니다.

 

 

 

 

 

태평성대 - '무주의 치(武周之治)

 

 

측천무후는 국법을 엄격히 해 사회 안정을 이루고 과거제도를 개편하여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두루 등용하였으며 부정하거나 부패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거나 사형을 내리기도 하면서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였습니다.

 

 

농업을 장려하고, 농민들의 부역 경감, 불교 중흥 등 전반적으로 경제가 안정되었으며, 15년 동안 민란이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백성들의 삶은 풍족하여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당 태종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갈 만큼 태평성대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그녀의 정치적 능력을 인정해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고 불렀습니다.

 

 

 

당나라 부활과 측천무후의 죽음

 

 

세월이 흘러 노쇠해진 측천무후는 여릉왕으로 강등되어 있던  중종 이현(李顯)을 다시 태자로 책봉했고 705년 측천무후가 병석에 눕게 되자 재상이던 장간지가 군사를 이끌고 측천무후에게 찾아가 당나라의 복원을 요청하자 측천무후는 이를 승낙하여 중종이현(李顯)22년 만에 다시 황제로 즉위하였고  당나라 황실은 15년 만에 복권되었습니다.

 

그 해 11월 중종 이현과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를 불러 유언을 남기고 82세로 사망합니다.

 

유언: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자신이 죽으면 황제 칭호를 없애고 '측천 순성 황후'라고 칭하도록 했으며 고종(남편)의 건릉에 합장하고, 자신의 묘비에는 아무 글자도 새기지 말라(무자비無字碑), 왕 황후와 소 숙비 등 죄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의 성씨와 관직 회복시켜라.

 

 

측천무후의 무자비(無字碑)

 

측천무후 평가

 

무측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고 그녀의 인생에 대한 논쟁거리들도 많이 있습니다. 봉건시대에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고 자신의 꿈을 현실에서 펼쳐낸 그녀 또한 초기 당나라를 이끈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측천무후가 민생을 잘 살피고 태평성대를 일궈냈으며 인재 등용과 정치적 능력이 뛰어난 정치가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여성으로서 황제보다 더 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황위를 찬탈한 잔인한 폭군으로 자신의 일족을 조정에 등용해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에 대해서 혹평하는 부정적 평가가 있습니다.

 

 

측천무후는 황후가 되고 황제가 되기까지 친 딸과 아들 둘을 죽이고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와 정적 제거 등 숱한 잔혹 행위로 중국 3대 악녀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